체험! 발견! 마츠시마 만

마쓰시마만을 배우다

다테 문화와 마쓰시마만

다테마사무네공과 즈이간지, 영지 마쓰시마

즈이간지 보물과 과장 학예사 니이노 가즈히로 씨

시도(이 땅의) 정토 ~ 마음에 그리는 풍경 ~

일본 삼경의 하나인 마쓰시마는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관광지입니다. 또한 국가나 현의 지정 문화재도 있어, 그 대부분이 헤이세이 28년(2016년) 에는 일본유산 “마사무네가 기른 ‘다테’한 문화”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일대 관광지가 되고 있습니다만, 마쓰시마의 본래 모습은 와카야마현의 고야산(高野山)이나 아오모리현의 오소레야마산(恐山)과 같은 신불이 머무는 성지나 영지입니다. 옛사람들은 마쓰시마 같은 멋진 경치를 가진 곳은 사람의 힘이 닿지 않는, 신불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절경을 보았을 때 놀라움과 함께 떨리는 마음과 감각이 신불을 연상시켰는거죠. 그리고 이런 땅에는 적잖이 절과 신사가 세워졌습니다

마쓰시마에도 텐쵸 5년(828년)에 지카쿠다이시엔닌에 의해 천태종 엔푸크지(연복사)가 세워졌다고 즈이간지에 전해지는 “텐다이유이쇼키(천태유서기)”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은 한곳에 있지 않고 즈이간지의 북동쪽 산 위에 여러 개의 불당이 나눠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바다 쪽에 세워져 있던 것이 마사무네 공이 재건한 고다이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엔푸크지는 주지가 없는 기간이 많아 그다지 활발한 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부처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세상이 어지럽고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는 “말법의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이 퍼집니다.

삶은 고달프고 죽음이 곁에 있던 사람들은 다음 생에는 극락정토로 가고 싶다 빌게 됩니다. 그러자 성지·영지였던 마쓰시마의 경치는, 점차 극락정토 그 자체의 경치라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시대 중, 쵸지 1년(1104년)에 호키노쿠니(현재의 돗토리현)에서 켄부츠쇼닌(견불상인)이 마쓰시마에 옵니다. 상인은 오시마(雄島)에 작은 절을 짓고 12년 동안 끊임없이 법화경을 외우며 법력을 얻어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게 되었고 종종 기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명성은 조정까지 전해져 겐에이 2년(1119년)에 도바 상왕으로부터 불상과 히메마츠 천본 등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을 계기로 엔푸크지보다도 상인의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됩니다.

12세기 후반이 되면 오시마에 돌아가신 분의 뼈 일부를 묻는 납골이라는 행위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상인이 살고 있던 오시마에 납골함으로써 극락정토로 갈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결연이라 하여 같은 의미로 13세기 말엽부터 돌아가신 분을 공양하기 위한 석탑인 칸토(関東)발상의 판비가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납골도 판비를 세우는 것도 처음에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차츰 일반 사람들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오시마는 극락정토의 입구, 영지인 마쓰시마의 중심지가 되어 가는것과 같이 마쓰시마가 영지임을 결정지었던 것입니다.

자, 오시마(雄島)에 판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인 13세기 중반, 홋신젠지(法身禅師)를 주지로 맞아 임제종 엔푸크지(円福寺)가 현 즈이간지 경내에 세워집니다. 이전에는 “텐다이유이쇼키(천태유서기)”에는, 천태종 엔푸크지(延福寺)가 멸망해 임제종 엔푸크지(円福寺)로 계승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발굴조사나 문헌 등을 통해 엔푸크지(円福寺)는 장소를 새로 정해서 지어진 절이며, 멸망했다고 여겨졌던 엔푸크지(延福寺)도 근소하게 존속하고 있었다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엔푸크지(円福寺)는 무로마치 시대에는 고잔짓사츠(五山十刹)에 이어 쇼잔(諸山), 나중에는 짓사츠(十刹)까지 이루어 번성하였으나 센고쿠시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고 16세기 말에는 건물도 규율도 무너집니다."

국가 교체로 요네자와에서 이와데야마로 옮겨있던 다테 마사무네 공은 센다이를 영지의 중심으로 정해 게이쵸 8년(1603년)에 완성한 센다이성으로 옮깁니다. 게이쵸 9년(1604)에 세키가하라의 전승 기원이 이루어진 답례로서 고다이도를 재건하고, 이어서 황폐해진 임제종 엔푸크지(円福寺) 재건 사업을 시작합니다. 양재를 기슈 쿠마노(와카야마현)에 주문해, 공인을 킨키에서 불러, 5년의 세월을 들여 게이쵸 14년(1609년)에 완성한 절은 명칭을 즈이간지(정식 명칭은 즈이간엔후쿠젠지)로 고쳐 운고젠지(운오 전시)를 주지로 맞이해 다테가(伊達家)의 절로 했습니다. 즈이간지 본당에 걸린 액의 마쓰시마방장기에는 이때의 사연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국가의 안태와 백성의 평온을 기원하는 절” 이라고도 새겨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 전란의 세상에 몸담고 있던 마사무네공한텐는, 성지·영지에 세워진 역사 깊은 절을 재건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것”으로, 그로 인해 영지인 마쓰시마에 “결연하여 조상의 극락정토로 왕생을 바란다”는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테가(伊達家)에 의해 지어진 즈이간지의 좌우에 있는 요토쿠인(陽徳院), 엔츠인(円通院) 그리고 테이린인(陽德院)는 물론, 에도시대 중기에 크고 작은 것을 통틀어 최대 40채 정도가 있었던 불당도 같은 생각과 염원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대부분은 메이지 초기에 없어졌지만, 당시의 사람들의 바램이나 생각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마쓰시마를 산책하면, 또 다른 경치가 보일 것입니다.

포인트
지금은 관광지로 유명한 마쓰시마 이지만, 이전에는 승려들의 수행 장소이자, 극락정토를 바라는 서민의 기도 장소=영지 로서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적막하게 떠오르는 오시마에도,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려 방문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쓰시마에 많이 남아있는 작은 사당과 판비들을 찾아보며 옛사람들의 추억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즈이간지 보물과 과장
학예사 니이노 가즈히로 씨
메세지
마쓰시마의 훌륭함은 말이나 사진으로 전하는 것은 어렵고, 실제로 오셔서 풍경을 보고 느끼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백문불여일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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